상향 평준화의 시대

아주 오래 됐네요. 2005년에, 싸구려 이어폰만 쓰다가 음질에 대한 불만 때문에 당시에는 젠하이저 최고급 라인이었던 HD650을 큰맘 먹고 덥썩 질렀습니다. 정말 기존에 쓰던 것들이랑은 소리가 차원이 달라서 너무 좋았습니다. 다만 당시엔 PC 직결로는 650을 울리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가성비 떨어지는 중고가 DAC/앰프를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일반 대중적인 제품과는 급이 다른 소리였기 때문에, 뭔가 특별한 오디오파일이 된 듯한 자부심에 한동안 기분 좋게 음감을 했었는데..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더 싸고 좋은 것들이 속속 나오더군요. 
 

토핑 보급형이나 아톰 같은 작은 놈들이 그 울리기 힘들다는 6 시리즈를 꽤 여유롭게 울려주질 않나, 고작 몇 만원짜리 소나타 HD 프로가 나오면서 기존에 쓰던 수십짜리 어설픈 DAC/앰프가 입지가 좁아지고, 더 싼 하이파이맨 순다라가 성능 면에서 젠하이저 6시리즈를 넘어서는 등 비싼 구세대 VS 싼 신세대 간에는 가격이 곧 성능이라는 공식이 점점 희미해진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어쨌든 급기야는 7500원짜리 이어폰이 레퍼런스급에 버금가는 소리를 내주는 시대가 올줄은 몰랐습니다.

옛날엔 정말 7500원이면 대한항공 기내 헤드폰 음질 정도만 기대해야 하는 수준이었잖아요.. ㅎㅎ
 

10배 비싸면 10배 소리는 원래 기대 안 했으나, 적어도 10배 비싸면 2~3배 소리 정도는 들려줬음 하는데 점점 보급형과 고급기 사이의 갭이 줄어드는 거 같아 하이엔드에 대한 열망이 좀 죽고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가성비 고려 없이 최고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돈을 쏟아 부어야 한다는 사실엔 변함은 없지만, '이 정도면 음악 즐기기엔 충분한' 필요충분조건을 충족시키는 보급형 제품이 예전보다 확실히 많아진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차별화된 오디오파일 제품을 쓰고 있다는 자부심이 점점 희미해지는 게 섭섭하면서도, 상향 평준화가 되면서 저렴한 가격에 좋은 선택지가 점점 많아지는 거 같아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