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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단

엘리시안 어쿠스틱 랩 - 디바, 어나이얼레이터

루릭 루릭
409 2 0


글.사진 : 루릭 (blog.naver.com/luric)


애용하는 DAP를 한 개 들고 이어폰 소리를 들으러 청음 매장으로 룰루랄라 놀러갑니다. 조금 하드코어하게 가겠다면 노트북 PC와 DAC 헤드폰 앰프를 챙겨 가서 헤드폰을 들어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게 됩니다. 직접 제품들을 비교 청취해보면, 가성비가 끝내주는 제품도 있지만 역시 비싼 것이 비싼 소리를 낸다는 생각입니다. 청음 매장에서 한 두 번 듣는 게 아니라 제품을 직접 구입해서 장기간 사용하면... 이런 생각이 더욱 굳어집니다.


이 타이밍에 잠시 '이어폰의 구조'를 생각해봅시다. 쪼끔 전문적 뉘앙쓰를 더해서 인이어 모니터(In-Ear Monitor, IEM)의 내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생각해보십시다. 사실 별 다른 것은 없습니다. 아주 작은 하우징 속에 전선과 드라이버(트랜스듀서)가 있으며, 더 비싼 이어폰에는 크로스오버 네트워크 회로와 콘덴서 같은 부품이 추가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부품들은 대부분 제조사가 따로 있습니다. 다이내믹 드라이버는 장비를 구입해서 직접 원하는 소리로 제조할 수도 있으나, 밸런스드 아머처(BA), 정전형(EST), 평판형(PM) 드라이버 같은 부품은 대량 생산하는 회사에게 주문을 넣고 공급 받아야 합니다. 소리와 관련된 다른 부품들도 이어폰 회사가 직접 만들어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오로지 자신의 소리 감각과 노하우로 고가의 인이어 모니터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참 대단한 겁니다. 남들과 같은 부품을 모아서 이어폰을 만드는데 제작자의 생각과 기술에 따라서 다른 소리가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현재 IEM 회사 중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한 곳들은 직접 이어폰을 분해하고 새로 만들어내면서 경험을 쌓은 'DIY 유저'의 회사가 많습니다. (*보청기 제작 전문가로 일하다가 인이어 모니터로 옮기는 경우도 있음) 사실 오디오 분야 전반에서 이런 경우가 흔하지만, 제 생각에는 이어폰 헤드폰 제작자가 가장 개인적으로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IEM 회사가 성공적으로 데뷔하고 하이엔드 모델을 판매한다면, 이어폰 업계에서는 상당한 화제가 됩니다.



엘리시안 어쿠스틱 랩(Elysian Acoustic Labs)은 말레이시아의 IEM 회사로, 국내에서는 이펙트 오디오(Effect Audio) 브랜드로 출시된 가이아(Gaea) 이어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이아는 200만원대의 가격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팔려나가고 있는데요. 이펙트 오디오는 이 제품의 기본 케이블과 내부 선재를 담당했으며, 이어폰 본체는 엘리시안 어쿠스틱 랩의 작품입니다.



저도 가이아의 소리를 직접 들으면서 요 엘리시안이라는 양반들이 보통이 아니구나~ 생각했더랬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이 회사가 정식으로 국내 진입을 시작합니다. 6 BA의 200만원대 이어폰 '디바(DIVA)', 1 DD + 2 EST + 4 BA의 400만원대 이어폰 '어나이얼레이터(ANNIHILATOR)'입니다. 지금 미리 말씀 드릴 수 있는 점은, 이펙트 오디오 가이아의 소리를 좋아한다면 디바와 어나이얼레이터도 마음에 들 것이라는 짐작입니다. 또한, 두 제품 모두 몇 가지 사항이 업그레이드된 2023년형이라고 합니다.



SOUND



두 이어폰은 가격 차이가 크지만 소리 특징에서는 많은 점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디바는 중음을 중시하며 음색이 중립적 성향이고, 어나이얼레이터는 소리에 화려함과 웅장함을 더한다는 특징이 있으나, 두 제품을 오랫동안 경험해보니 엘리시안 어쿠스틱 랩은 고유의 사운드 시그니처를 구축해서 계속 이어나갈 것으로 보입니다. 이어폰 모델 간의 소리 차이는 뚜렷한데 근본적인 핵심 주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디바와 어나이얼레이터를 따로 두지 않고 한 집안의 형제를 소개하는 것처럼 다수의 공통점부터 서술하겠습니다.


드라이버 감도가 낮아서 더 높은 출력이 필요합니다. DAP로 듣겠다면 4.4mm 밸런스 출력이 있는 DAP에서 하이 게인(High Gain)으로 듣기를 권합니다. 두 이어폰의 잠재력을 제대로 뽑아내고 싶다면 거치형 DAC 헤드폰 앰프를 권장하겠습니다. 제작자가 노이즈 억제를 위해서 일부러 이어폰의 드라이버 감도를 낮게 설계하는 경우가 있는데 디바와 어나이얼레이터가 딱 그렇습니다. 청음 매장에서 들어볼 때는 DAP의 볼륨을 꽤 올려야 할 것입니다.



명확한 음색 특징을 보이지 않습니다. 더 넓고 선명한 느낌을 위해서 주파수 응답을 주물러놓았지만, 뭔가 튀거나 약해지거나 하는 변주가 없습니다. 이게 심심하게 다가올 수도 있겠습니다. '오디오는 하이엔드로 올라갈수록 소리가 심심해진다'는 평범한 개념을 제대로 증명해주는 이어폰들인데요. 그래도 음색을 생각해보면 어나이얼레이터는 포근한 저음과 화사한 고음이 혼합되면서 밝은 느낌이 들고, 디바는 충실한 중음과 무색무취의 고.저음이 있어서 중립적이거나 약간 어둡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음색 속성에는 기본 포함되는 케이블의 특성도 한몫을 합니다.) 그리고 타 브랜드 이어폰들과 비교하면 둘 다 음색이 거의 없으며 밸런스를 중시하는 편입니다. 체감되는 주파수 응답 형태는 둘 다 고.중.저음의 균형을 꼼꼼하게 맞춘 후 초저음만 강조한 형상입니다.


뚜렷한 초저음 강조가 있습니다. 제작자가 일부러 만들어둔 세팅이라고 직감하게 되는데요. 높은 저음은 평탄한데 초저음만 강조되어서 이어폰 속에 서브 우퍼가 별도로 존재하는 느낌이 듭니다. 이어폰에서 웅장한 배경의 대형 헤드폰 느낌을 얻고 싶은 사람들에게 큰 장점이 되겠습니다. 디바와 어나이얼레이터 모두 초저음 강조가 있는데 어나이얼레이터가 더 크고 강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BA로 초저음을 재생하는 디바가 DD로 재생하는 어나이얼레이터와 거의 똑같은 저음 감촉을 낸다는 겁니다. 저도 제품 소개서를 받아서 보기 전까지는 디바에도 DD 우퍼가 들어 있는 줄 알았습니다. 디바는 아마도 덩치 큰 저음용 BA를 내장하고 있을 것입니다.



초저음을 제외한 모든 음 영역의 밸런스가 대단히 좋습니다. 멀티 드라이버의 강점을 살려서 초고음, 고음, 낮은 고음, 높은 중음, 중음, 낮은 중음, 높은 저음, 저음 - 이런 식으로 음을 촘촘히 나눠서 넓게 정렬해줍니다. 제품 등급이 있으니 모든 측면에서 조금씩 어나이얼레이터가 앞서지만, 디바도 하이엔드 인이어 모니터의 놀라운 음 분리 능력과 고해상도를 기본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그만큼 둘 다 소스 품질을 명확히 드러내는 편이므로 DAP든 헤드폰 앰프든 이어폰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가격의 하이엔드급으로 맞춰주기를 권장합니다. 디바, 어나이얼레이터로 스마트폰 헤드폰잭에서 손실 압축 음반을 듣는 것은... 최대한 피하고 싶습니다.


소리 선이 가늘게 나옵니다. 굵고 강한 소리를 애초부터 완전히 지양하고 있습니다. 묵직하고 낮게 깔리는 느낌이 드는데 소리를 구성하는 선이 가늘다는 겁니다. 한 가지 비유를 해보겠습니다. 같은 굵기와 무게의 케이블이 있는데 1번 케이블은 통짜 전선 몇 개로 되어 있고 2번 케이블은 가느다란 선을 아주 많이 모아서 만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디바와 어나이얼레이터 모두 2번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속성은 소리를 세밀하게 분리하고 해석하는 능력으로 이어지며 청각 자극이 없어서 편안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하이파이 오디오 방식으로 분류한다면 다분히 여성적인 소리라고 하겠습니다.



아시아의 새로운 구역에서 데뷔한 인이어 모니터 회사인데 제대로 주목 받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른 회사들과 차별화된 소리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제품 가격이 비싼 이유는? 그 차별화된 소리가 다양한 고급 특성을 보유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어폰에 진지한 상급 유저들이 만족할 정도로 가치가 있으니 성공적으로 데뷔해서 이어질 수 있었을 터입니다. 굳이 비유한다면, 이탈리아 회사들의 혈통이 지배하는 하이엔드 스포츠카 시장에서 스웨덴 출신으로 데뷔하여 현재는 끝판왕 수준의 하이퍼카 시장에 자리 잡은 코닉세그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엘리시안 어쿠스틱 랩의 소리는 코닉세그 차량의 가속처럼 아찔하지는 않겠으나 이어폰 한 개로 음악 감상을 전부 커버하면서 색다른 만족도 함께 줄 수 있습니다.



Elysian Acoustic Labs DIVA



"중음을 보강한 레퍼런스 성향의 하이엔드 인이어 모니터. 거의 무특성에 가까운 소리를 매우 선명하고 넓게 듣는다고 보면 된다. 진정한 올라운더 이어폰이며, 초저음만 보강해서 음악 감상의 든든한 기반으로 사용한다. 더욱 충실하고 감성적인 중음으로 보컬, 현악기에 최적화된다."



디바와 어나이얼레이터는 쉘의 크기가 동일합니다. 둘 다 체급이 좀 나오는 덩치라서 귀에 착용하면 페이스 플레이트가 밖으로 많이 튀어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인이어 모니터의 유니버설 핏 제품이므로 하우징 연마가 잘 되어 있어서 귀에 편하게 착용할 수 있습니다. 둘 다 노즐이 굵은 편이므로 혹시 다른 이어팁을 쓰고 싶다면 내부 직경이 5mm 넘는 것을 고르시기 바랍니다.



디바의 디자인은 유광 검정색의 쉘과 무지개색의 글리터 페이스 플레이트로 구성됩니다. 이 페이스 플레이트는 평소에는 차분한 느낌으로 보이지만 빛을 받으면 화려함이 살아납니다. 원래는 세 가지 색상이 있는데 국내에서는 지금 보여드리는 블랙 색상이 들어온다고 합니다.



쉘의 뒤쪽을 보면 저음 조절 스위치가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초저음의 양을 조절하는 스위치로 보이는데요. 흰색이 기준점이고, 파랑색은 초저음 증가, 빨강색은 평탄한 초저음이 됩니다. 물론, 제가 쓰는 감상문은 흰색을 기준으로 작성했습니다. 이 스위치는 음악 감상 도중에도 얼마든지 다룰 수 있으므로, 기본 포함되는 도구를 사용해서 취향에 맞게 돌려보시기 바랍니다.



디바의 기본 케이블은 이펙트 오디오 아레스 S입니다. 재생기 쪽은 4.4mm 커넥터이고 이어폰 쪽은 펜타콘 이어 커넥터를 사용합니다. 즉, 디바의 케이블을 다른 제품으로 바꾸고 싶다면 ConX가 적용된 이펙트 오디오 제품이나 개인 주문 제품으로 대응해야 하겠습니다. 아레스 S는 저도 구입해서 IEM 케이블을 리뷰할 때 비교 청취용으로 쓰고 있습니다. 순수 동선답게 고음의 색을 바꾸지 않으며 중.저음을 두텁게 보강해서 이어폰 소리가 조금 뜨끈해지는 특징이 있는데요. 디바의 음색이 중립이거나 약간 어둡게 들리는 이유의 바탕이 되겠습니다.



디바의 소리 특징을 몇 가지 짚어봅시다. 이 제품은 6 BA 이어폰이라고 하는데 초저음이 DD 우퍼 같습니다. 어나이얼레이터와 비교 청취해봐도 진짜 DD 같은 느낌의 고밀도 초저음 진동입니다. 100Hz 아래의 저음이 아주 깨끗하고 깊게 울립니다. 의도적으로 강조한 초저음인데 다른 음을 조금도 침범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배경으로 빼낸 초저음 영역이군요.


게다가 초저음 진동이 강력합니다. 음악에 따라서 초저음 강조가 뚜렷한 곡도 있는데, 그런 곡을 듣고 있으면 두뇌가 물리적으로 진동하는 듯합니다. 이 느낌에 감동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원래부터 저음형 이어폰에 약한 사람이라면 다른 이어폰을 찾는 게 나을 것입니다. 두웅~ 두우웅~ 두우우우우우웅~하고 저주파가 계속 진동하는 경험이 저로서는 신선했습니다. (-_-)a 엘리시안 어쿠스틱 랩에 관심이 많아서 청음 매장에 왔고, 직접 들어보니 디바의 전체적 성향이 마음에 드는데 초저음이 부담스럽다면? 저음 조절 스위치를 빨강색으로 돌려서 한 번만 더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초고음과 초저음이 확장되어 있어서 심리적 공간이 넓어집니다. 드넓은 수평선을 그리는 깨끗한 사운드 이미지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멀티 드라이버인데 소리 연결이 대단히 자연스럽습니다. 멀티 드라이버의 소리 입체감을 잘 살리면서도 산만한 느낌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소리 요소가 통합된 조직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입니다. 다수의 드라이버를 쓰면서 자연스러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하이엔드 인이어 모니터 회사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 점이 엘리시안 어쿠스틱 랩의 가장 큰 무기로 보입니다.


소리의 질감이 매우 곱습니다. 고급 비단결 감촉이고, 초극세사 헝겊의 표면입니다. 분명히 평탄한 소리는 아닌데 주파수 응답 속성을 조절할 때 사람 귀에 걸리거나 찔리는 부분이 없도록 세심하게 연마해둔 인상을 줍니다. 고막에 압박을 주지 않으며 아주 섬세하고 정밀하게 분해되는 소리입니다. BA 이어폰인데 DD 이어폰처럼 고.중.저음 모두 밀도가 매우 높은 게 신기하군요. 소리의 무게와 감촉이 액체나 고체에 가깝습니다. 대다수의 BA 이어폰 소리가 기체 느낌을 주는 것과 크게 대조되는 점입니다.



보컬의 주요 음 영역을 보강해두었습니다. 첫 감상부터 중음과 높은 중음이 굵은 선으로 명확하게 들림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 목소리와 현악기 소리를 앞으로 끌어당기지 않고 무대 중앙에 두되, 마이크를 하이엔드급으로 마련해준 듯한 기분이 듭니다. 전체적으로 가녀리고 고운 인상을 주는 소리에서 중음 영역만 더 높은 밀도와 무게를 내는 점이 색다릅니다.




Elysian Acoustic Labs ANNIHILATOR



"끝없이 올라가고 내려가는 초고음과 초저음의 향연. 이어폰의 영역을 벗어나는 공기와 공간의 경험을 할 수 있다. 고음의 화려함과 초저음의 웅장함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특징과 자극을 지양하는 소리라서 제 맛을 느끼려면 오너가 나름대로 감상 경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밝고 포근한 느낌이 있으며 대단히 부드러운 감촉으로 아주 편안하게 음미할 수 있다."



해외의 헤드파이 관련 행사에서 엘리시안 어쿠스틱 랩을 주목 받게 해주는 이어폰이 어나이얼레이터입니다. 색상은 실버, 골드, 티타늄 버전이 있는데 국내에는 더욱 화려한(?) 골드 색상이 들어온다고 합니다. 이 제품은 다이내믹 드라이버, 밸런스드 아머처 드라이버, 정전형 드라이버를 혼용한 트라이브리드 이어폰이며, 사진으로 보기만 해도 굉장히 비싼 느낌이 팍팍 오는 비주얼입니다.



어나이얼레이터는 기본 케이블이 무거운 편입니다. 선이 아니라 화려한 금속 플러그들이 묵직합니다. 이 8심 케이블은 리퀴드 링크(Liquid Links)의 마티니(Martini)라는 제품으로, 팔라듐 도금 은선과 금 도금 동선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케이블 색상이 어나이얼레이터 골드 색상과 아주 잘 어울립니다. 케이블의 커넥터는 디바와 마찬가지로 재생기 쪽은 4.4mm, 이어폰 쪽은 펜타콘 이어를 탑재했습니다.



어나이얼레이터의 디자인은 고급 그 자체라고 하겠습니다. 하이엔드 이어폰 매니아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유난히 투명한 쉘의 내부로 으리으리한 부품들을 자랑하며, 황금빛 페이스 플레이트가 빛 반사를 일으켜 주변까지 번집니다. 이어폰을 아예 모르는 사람에게 보여줘도 '우와... 이거 엄청 비싼 거죠? 맞죠?'라고 반응할 것 같습니다.



이어폰이 수백 만원대 가격을 찍으려면 듣는 이의 청각을 휘어잡는 감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나이얼레이터는 바로 그런 점을 노리고 설계됐습니다. 자연스러움, 균형, 초저음 강조, 섬세한 소리 선 등으로 이뤄진 '엘리시안 어쿠스틱 랩의 주제'를 유지하면서 감동을 줍니다. 어떤 한 두 가지 특징으로 인해 놀라는 것이 아니라, 소리의 수많은 요소들이 골고루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면서 전체 평점을 올리는 방식입니다.



그렇다는 뜻은... 이 제품의 소리에 감동하려면 유저가 상당한 소리 경험과 가치관을 지니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이엔드 인이어 모니터의 소리를 안 들어본 사람도 어나이얼레이터를 처음 써보면 뭔가 아주 좋다며 놀라겠으나, 진짜로 감동해서 이 제품을 구입할 정도가 되려면 경제력 뿐만 아니라 '휴대 음향의 미식가' 같은 성격도 지녀야 합니다. 그러면 어나이얼레이터가 만들어내는 휴대 음향 미식가의 감동 목록을 하나씩 체크해봅시다.



자연스럽습니다. 정전형 트위터와 다이내믹 우퍼를 통해서 초고음과 초저음을 크게 확장했는데 밸런스드 아머처 드라이버들이 내는 소리와 거의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이 강렬한 공간감과 합쳐지면서 사운드 이미지의 새로운 영역을 느끼게 만듭니다. 이 제품의 첫 소리 경험을 하겠다면 첫 곡은 반드시 대편성 오케스트라 연주를 선택합시다. 클래식 악곡이 싫다면 오케스트라 녹음으로 만들어진 영화 음악이나 에픽 뮤직을 들어봅시다. 그 중에서도 음반을 만든 사람이 콘서트홀 울림을 중시한 곡이 더욱 좋습니다. 첫 청취부터 어나이얼레이터는 공기가 살아움직이는 크고 넓은 공간 속으로 유저를 푹 빠트려버립니다.



이러한 장점은 음반 선택에도 영향을 줍니다. 고해상도 음반 중에서 라이브 DSD 레코딩을 듣는다면 '이것이 공기와 공간이다!!'라고 외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어폰 자체에서는 잔향을 만들지 않는데 음반 속의 공기 움직임이 기겁할 정도로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돌비 애트모스 기술을 돌비 애트모스 기준으로 세팅된 룸에서 들으면 진짜 끝내주는 공간을 경험할 수 있다는데, DSD 음반과 어나이얼레이터의 조합은 최상급 공간 음향이라도 적용된 듯한 경험을 줍니다.


이 제품의 고음 영역은 BA 트위터가 대부분을 담당하며 끝부분의 아주 세밀한 '마무리 부분'을 정전형 트위터로 처리하는 듯합니다. 정전형 트위터의 지나치게 강한 고음 특성을 깔끔하게 지우고 오로지 공기 느낌만 살리도록 만들었습니다. 예전에 들었던 비슷한 가격대의 이어폰을 떠올리면 라임 이어스 애니마(Lime Ears Anima)와 흡사한 고음입니다. BA 트위터의 고음은 선이 가늘고 감촉이 매우 고우며 무척 현란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전형 트위터를 조합해도 고음의 색깔이 바뀌거나 청각 자극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고음이 더 많이 현란해지며 놀라울 정도로 매끄러운 질감을 형성합니다. 이런 고음에 저음 영역에서 올라오는 포근한 기운이 혼합되면서 전체 음색은 화사하게 빛을 내는 느낌이 듭니다.



어나이얼레이터의 첫 청취로 오케스트라 연주를 권하는 또 다른 이유는 초저음의 감동입니다. DD 우퍼가 만드는 100Hz 아래의 진동에 가까운 초저음이 굉장히 크고 넓으며 깊게 내려갑니다. 오케스트라 연주에서 팀파니 파트가 적극적으로 들어오는 곡이라면 팀파니의 소리가 그토록 깨끗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초저음의 밀도가 높은데도 고막을 무겁게 누르지 않으며 매우 높은 탄력으로 통통 튀는 듯한 재미를 줍니다. 그러면서 청취자의 양쪽 귀 아래로 얇은 막처럼 명료한 초저음이 흘러다닙니다. 고음, 중음, 저음 영역은 하도 균형이 좋아서 뭔가 집어낼 특징이 없는데, 초고음과 초저음이 다른 영역을 찍으면서 소리가 이어폰의 작은 부피를 벗어나 대형 헤드폰을 시뮬레이션하기 시작합니다.



이 제품의 소리에서 짜릿한 맛의 조미료는 조금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게 하이엔드 이어폰 중에서도 어나이얼레이터의 호불호를 나누는 점입니다. 물론 하이엔드 오디오 시장에는 조미료를 뺀 맛이 훨씬 많지만, 큰 비용을 들인 만큼 화끈한 맛을 느끼고 싶은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어나이얼레이터의 소리 특징은 '섬멸자'라는 위협적 이름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기와 공간의 느낌이 아찔하지만 소리의 맛은 '손님의 미간에 절대로 주름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하는 쉐프가 만든 것 같습니다. 주파수 응답을 어찌나 오밀조밀하게 오랫동안 연마해뒀는지 청각에 뭔가 찌릿한 특징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너무나 편안하며, 너무나 부드럽고 매끈한 소리입니다.


즉, 어나이얼레이터의 초고해상도와 음 분리 능력은 청각을 놀라게 하는 게 아니라 최대한 불편 없이 아늑하게 여행하도록 만들어진 하이엔드 투어링 세단과도 같습니다. 쉽게 말해서 롤스로이스, 벤틀리 같은 소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이 리뷰는 셰에라자드의 고료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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